Har Shalom Editorial
הר שלום · Peace Mountain

자선이 아니라 정의, 체다카

자선이라는 번역이 놓치는 것

체다카(tzedakah)는 보통 한국어로 “자선”이나 “기부”로 옮겨집니다.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이 단어가 유대 전통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떠올리면 절반만 전한 셈입니다. 영어의 charity가 베푸는 자의 너그러움을 강조한다면, 체다카는 그 결이 사뭇 다릅니다. 무게중심이 주는 사람의 선의가 아니라 다른 곳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어근이 가리키는 방향

체다카는 “정의” 또는 “올바름”을 뜻하는 히브리어 어근 츠-디-크(tz-d-q)에서 나왔습니다. 같은 뿌리에서 “의로움”을 뜻하는 체데크가 갈라져 나옵니다. 그러니 가난한 이를 돕는 일은 마음이 내킬 때 베푸는 호의가 아니라, 마땅히 돌려주어야 할 몫을 돌려주는 정의의 실행으로 이해됩니다. 내 손에 있는 재물조차 온전히 내 것만은 아니라는 전제가 그 밑에 깔려 있습니다. 이 단어의 성경적 배경은 My Jewish Learning이 잘 정리해 두었습니다.

선택이 아니라 의무

charity coins

이 관점에서 체다카는 권장 사항이 아니라 율법이 부과한 의무에 가깝습니다. 랍비 문헌은 체다카를 두고 나머지 모든 계명을 합한 것과 맞먹는다고까지 표현했습니다. 베푸는 쪽의 기분이 아니라 받는 쪽의 필요가 판단의 중심에 놓인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우연과 결과를 다루는 유대적 시선이 통제 밖의 영역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듯, 체다카 역시 불평등이라는 우연을 인간의 책임으로 끌어들이는 장치입니다.

마이모니데스가 정리한 여덟 단계

12세기 학자 마이모니데스는 체다카를 베푸는 방식에 등급이 있다고 보고 이를 여덟 단계로 정리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는 마지못해 주는 것이고, 한 단계 올라가면 부족하게나마 기쁜 마음으로 주는 것입니다. 위로 갈수록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관계에서 수치심이 사라지는 방향으로 배열됩니다. 액수가 아니라 관계의 질이 등급을 가른다는 발상입니다.

가장 높은 자리

그가 최고로 꼽은 단계는 돈을 쥐여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자리를 마련해 주거나 동업을 제안하거나 자립의 발판을 만들어, 그 사람이 더는 남의 도움에 기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을 의존 상태에 묶어 두지 않고 스스로 설 수 있게 하는 도움이 가장 의로운 베풂이라는 뜻입니다. 도움의 목적이 당장의 결핍을 메우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독립에 닿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름을 감추는 윤리

중간 단계에서 마이모니데스가 특히 강조한 것은 익명성입니다.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고, 받는 사람도 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방식이 그 위에 놓입니다. 받는 이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제도로 굳어진 것입니다. 베풂의 가치를 금액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존엄으로 재는 관점이 여기서 가장 또렷이 드러납니다.

동전 통과 십일조

체다카는 거창한 기부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많은 유대 가정에는 푸쉬케라 불리는 작은 모금함이 있어, 안식일 촛불을 켜기 직전에 동전을 넣는 관습이 이어집니다. 아이들은 이 작은 통을 통해 어릴 때부터 베푸는 일을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습관으로 익힙니다. 액수보다 매일 반복되는 행위 자체에 무게를 두는 방식입니다.

규모의 기준도 전통 안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수입의 일정 부분, 흔히 십분의 일을 떼어 내는 마아세르의 관행이 그것입니다. 얼마를 줄지를 그때그때의 감정에 맡기지 않고 미리 정해진 비율로 묶어 둠으로써, 베풂을 변덕이 아니라 예산의 일부로 만든 것입니다. 베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날에도 정해진 몫은 어김없이 나간다는 뜻입니다.

친절과 정의는 다르다

유대 전통은 체다카와 게밀루트 하사딤, 곧 “친절의 실천”을 구분합니다. 체다카가 주로 돈으로 결핍을 메우는 일이라면, 게밀루트 하사딤은 병자를 문병하거나 상을 당한 이를 위로하는 것처럼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행위까지 아우릅니다. 죽은 이를 돌보는 일은 보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가장 순수한 친절로 꼽히기도 합니다. 정의로서의 베풂과 사랑으로서의 베풂을 따로 이름 붙여 다룬다는 점이, 이 전통이 돕는 행위를 얼마나 세분해 사유했는지 보여 줍니다.

번역어를 의심해 보기

20세기 영국의 랍비 조너선 색스는 체다카를 한 단어로 옮기기 어렵다고 토로하며, 영어에서 그나마 가까운 말로 “사회 정의”를 들었습니다. 정의는 본래 냉정하고 비인격적인 개념이고 자선은 따뜻하고 인격적인 행위인데, 체다카는 이 모순된 두 축을 한 단어 안에 끌어안습니다. 그래서 “자선”이라는 번역만 붙들고 있으면 이 단어가 품은 정의의 무게가 통째로 빠져나갑니다. 일상의 관습으로 자리 잡은 체다카의 여러 면모는 Chabad.org의 정리에서 이어 볼 수 있습니다.